장용석 블로그
돌아가기
•
•
4 min read

해석가능한 세상

무념무치

사고의 많은 부분이 AI에게 의탁되었다. 맞이한 새로운 시대의 기조일까 싶기도 하다. 더 많은 걸 알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된 기쁨은 생겨났지만… 어째서인지 성취의 기쁨이 마냥 오래가진 않는다. AI랑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연구도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논문도 써보고 그간 해보고 싶었던 건 많이 해봤다. 폭포 아래서 쏟아 넘쳐나는 물에 감탄한다. 욕심 가득 담으려 바가지 들이밀지만 막상 바가지에 남는 물은 별로 없다.

사고의 의탁과 함께 책임의 의탁도 함께 일어난다. 발산하는 사고와 행동은 과정과 결과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간다.

무념무치의 상태가 되어간다.

이것이 새 시대의 기조라면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물리적으로 부술 증기 방직기도 없고 이미 삶의 모세혈관까지 스며들어 버려서 순응하는 사회가 되긴 할 것 같다. 굳이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지는 않다.

순순히 순응하고 싶진 않으면서도 힘은 누리고 싶은 모순된 생각이 든다.

순응과 저항 사이 언제나 극단적인 축 말고도 현명한 선택이 있겠지.
그것이 새 시대 모두의 과제일 것이지.

좋은 측면을 떠올려보자면, 오히려 세상의 비효율이 해소되어 가다 보니 조금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중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내가 ‘개발’이라는 키워드로 좋아하고 즐거워했던 것의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기회가 생겼다.

단순히 코드를 입력하는 것은 물론 엄청 재미를 주는 행위는 아니다. 무엇이 효능감을 주었을지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의 템포가 사람이 직접 코드를 칠 때 적절한 속도와 맞았기에 이런저런 고민들 사이에서 재미를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타이핑하는 와중에 병렬로 여러 고민들이 돌아가고 동적으로 고민들이 다시 타이핑의 목적을 갱신하고 이 과정이 즐거웠던 것이 아닐까.

빨라진 새 시대의 템포에서도 새로운 쉼이 있겠지만, 기존의 관성으로는 살짝 발 맞추기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일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에 지난한 일들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고맙지만…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게 만든다(미화된걸까?)

요즘 아침 일찍 수영을 다니고 있다. 수영을 할 때 숨을 쉴 타이밍을 잡는 것도, 그 타이밍에서 제대로 숨을 쉬어주기도 뭐든 적절하게 맞지 않으면 숨이 벅차오고 가라앉고 만다. 코로 물이라도 들어가면 아주 곤혹을 치른다.

어찌 보면 무념무치의 상태가 되었다기보단 내가 새로운 물에 던져진 상황이 아닌 것일까. 편법도 없고 열심히 다시 훈련하고 정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각자의 방법도 훈련법도 많을 것이고 익혀온 경험도 많아질 것이다. 개개인이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가치가 그 경험을 같이 나누고 쌓아올리는 것 아닐까?

해석 가능한 세상 (Explainable World)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원초적 호기심인 걸까? 이 또한 일종의 원죄일까? 이해를 넘어 해석 가능한 세상을 만드려 한다. 모호한 것, 알지 못하는 것은 심해 깊숙한 곳과도 같아서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무언가를 자극해온다.

본질적인 것은 이미 많이 파악된 것 같다. 물리 계층에서의 우리를 구성하는 힘과 재료들을 알고 있고 그것들이 근간을 두는 논리적 독립적인 수학 위에 놓여 있다.

다만 그 위로 수십 겹의 레이어들은 고도로 복잡하기에 아직까지 그 레이어 간의 관계를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내 눈앞의 참나무 잎을 보자. 이 잎을 구성하는 분자와 구성 물질들을 조사한다고 하자. 그것은 그 잎의 스냅샷의 단편을 알 수 있을 뿐 참나무란 머신의 전체 동작과 생태를 설명하진 못한다.

초파리의 커넥톰도 아직까진 그 개체의 특정 시점의 스냅샷일 뿐, 어떤 가중치를 가지고 물리적 감각점이랑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성장하는지를 설명하진 못한다.

개발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여러 프로젝트들을 봐오면 같은 프레임워크 위에 있더라도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그 프로젝트의 생태와 규칙을 대변하지 않는다.

단순 프로젝트의 코드만 가지고 알 수 있을까? 참나무와 같이 참나무가 존재하는 우주와 환경에 대해서도 알아야한다. 배포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어떤 레이어들을 거치는지… 일종의 하나의 생명체를 다루는 것과도 같다.

충분히 적당한 시간과 지능만 있다면 참나무와 달리 프로젝트의 생태와 동작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다 깨우쳤다는 것은 큰 장점이면서도 부재 시 큰 리스크가 된다. Well-known의 비율이 일정하다고 할 때 프로젝트는 확률적으로 무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abyss를 두려워하기에 해석 가능한 상태에 두고 싶어한다.

LLM은 그 확률을 많이 극복시켜 준다. Well-known 참여자를 대폭 늘려 확률을 개선한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 참여자의 비율이 커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외부에서 늘어난 것이니.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나와 나를 둘러싼 도구들을 하나의 논리적 그룹으로 볼 때, 우리가 지금, 앞으로 일상, 업무, 연구에서 도구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용하든, LLM은 그 그룹 안에서 무지에 놓일 확률을 낮춰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참여자가 늘수록 혹은 개별 구성원이 능동적일수록 그 확률은 개선되겠지만 결국 특정 구성원의 능력이 좋아질수록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그룹의 인지적 확장과 개별 인지의 향상은 모든 개별 요소와 비례하진 않는다. (우린 fade-out 되어 중인가?)

다시 돌아와서 참나무는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field에 존재하는 객체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들은 우리의 인지 아래 해석 가능한 것들의 집합으로 쓰여졌다. 인지의 능력이 변하면 언제든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모두가 AI를 끼고 일하니 실제 참여자도 이전처럼 인간이 아니라 증강된 인간들이 참여자이자 일종의 새로운 종이 탄생한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더 미래엔 교체되겠지만

RSS 구독